9-10세기, 불교 조각에 나타나는 변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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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세기의 신라는 정치, 사회적으로 크나큰 혼란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왕권을 둘러싼 골육상쟁과 지방 분권화가 정착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과 함께 불교계에서도 선종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유입되면서 9산선문이 성립되었다. 또한, 선종은 새롭게 성장하는 지방 호족 세력과 결합하면서 ‘철’이라는 신소재가 대두되었다. 선종은 불성을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진 종파이다. 완벽한 존재였던 부처가 이제는 누구나 깨달음에 이르면 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종의 특성은 대중을 포함한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에게 교종보다 더 호응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친근하게 교감할 수 있는 부처상이나 조형물들을 선호하게 된다. 전남 장흥군에 위치한 보림사는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선종 사찰이다.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선종이 장흥 지역 사람들과 만나 어떤 이미지를 창출했는지 보여준다. 무뚝뚝한 표정에 이마가 유난히 좁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의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철불의 왼팔 뒷면에는 헌안왕 2년에 김수종이 왕의 허락을 받아 불상을 조성했다는 명문이 적혀 있다. 이와 같이 신라 하대에는 중앙의 지원 없이 지방의 유지가 개인 재산을 들여 불상을 조성할 정도로 불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밖에도 865년 도피안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및 863년 동화사 비로암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등이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불상의 예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이들 불상에서는 고가의 금동불보다 철불이 많이 조성되었으며 그 지방의 색이 강했던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9세기로 들어오면서 석탑 또한 신라 하대 석탑 양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우선 기단 폭이 좁아지고 탑의 크기가 작아지며 세부 수법이 간략화되어 외양 위주의 장식성이 강조된다. 즉, 기단이나 탑신에 불상·12지상·사천왕상 등이 새겨진다. 그리고 옥개의 두께가 얇아지고, 층급 받침이 5단에서 점차 줄어들며 그 두께도 얇아져 초기 탑보다 섬약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하대 탑의 예로는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동화사 삼층석탑, 단속사지동·서삼층석탑, 화엄사동·서오층석탑, 보림사 삼층석탑 등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신라 하대에는 선종의 유행과 더불어 고승들의 묘탑인 부도가 많이 만들어진다. 법당 앞마당에 탑을 세워 부처를 신성하게 여겼듯이 선직자로서 승려에 대한 예우와 존경을 담아내고자 함이었다. 형식은 염거화상부도와 같이 8 각형 연화좌 위에 기와지붕을 한 8 각 당을 올리는 것을 기본 구조로 한다. 그리고 표면에 12지상·사천왕상·연화문을 비롯한 각종 문양 등을 조각하여 그 형태와 아울러 더욱 장식성을 높여 주고 있다. 태안사적인선사탑·쌍봉사철감선사탑·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등이 이러한 양식에 속하는 부도들이다. 철감선사 승탑은 화려한 장식의 신라풍 건축미를 잘 보여준다. 이 탑이 얼마나 섬세하고 뛰어난 가는 수키와 암키와의 모습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엄지손톱만 한 화강암 돌에 여덟 잎의 연꽃무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조각했다. 한편 승탑 옆에 세웠던 철감선사 비석은 사라지고 비를 받쳤던 거북과 비석 위의 이수만이 남아 있다. 이 석재들도 승탑 못지않은 조각 솜씨를 뽐낸다.
 

 9세기 승탑과 탑비들은 색다른 분위기의 문화 감각을 보여준다. 통일 신라 쇠퇴기에 지역 권세가들이 새로 유입된 국가와 사회를 꿈꾸며 형성된 변화라 할 수 있다. 승탑 기단의 운룡무늬오 마찬가지로 이수 장식의 동세 조각은 고려 초 10세기 ~ 11세기까지 이어져 신라에서 고려로 이동하는 변동기의 시대 정서를 여실히 반영한다. 통일신라의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고려 태조는 통일 국가의 정신적인 이념을 불교에 두었다. 그래서 수도인 개경에는 10대 사찰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고 이에 따라 불교 미술 또한 크게 발달을 보게 되었다. 호족의 성장을 기반으로 삼아 지방별 유파나 개성적 표현이 두드러졌고, 신비로운 조성 배경과 기복을 강조한 토속적인 형식이 부상했다. 또한, 신라 후기의 부처 모습을 계승한 고려 시대 <보원사지 철조 여래좌상> 보면 초월적인 존재라기보다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다. 즉 못난이 부처라고 부를 만큼 반듯한 사례가 거의 없다. 이 외에도 전국에 걸쳐 지역마다 개성적인 석불이랑 마애불들이 대거 제작되었다. 특히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등은 턱이 두툼하게 늘어지고, 매부리코에 긴 모자를 얹고 있다. 또한, 고려 초기와 전기의 불상은 상당히 크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 입상은 높이가 18m에 이른다. 이렇게 큰 불상을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호족들의 자유분방함과 패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많다. 불상 제작을 지원한 호족들은 권력자가 되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그 포부만큼 불상이 커졌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승과에 급제한 왕실 관료층 승려가 배출되면서 성직자로서 승려의 사회적인 위상, 특히 정치적인 역할이 커졌다. 그 여파로 승려의 초상 조각이 조성되었다. 개성 근처의 사찰에는 상당수의 고려 승려 조각상이 전해졌다고 한다. 특히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큰 힘을 보탰던 승려 희랑 대사의 조각인 해인사 건칠희랑대사 좌상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고려 시대의 석탑은 신라 전통 양식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석탑은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다각 다층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점차 지방적인 특색이 가미되었고 그 분포도 지역적으로 나눌 수 있다. 즉, 개성 이북에 조성된 고려 양식의 탑, 신라의 옛 땅인 경상도를 중심하는 하는 신라 탑 양식의 석탑 그리고 충청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는 백제 양식의 석탑 등으로 나뉜다. 특히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석탑은 강원도 평창 월정사 8각 9층석탑이다. 신라 때의 석탑은 주로 3층이었지만 고려에는 9층까지 높아졌으며 탑의 생김새도 4 각형에서 8 각형으로 바뀌었다. 바로 다각 다층탑으로 제작 기법이 바뀐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안정감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며 균형이 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하늘 높이 뻗었다는 점에서 고려 초기 호족들의 패기를 보여주고 있어 이 또한 귀족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탑이라 할 수 있다. 즉 9세기부터 10세기 나말여초의 시기는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있던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당시의 불상과 석탑들도 시대에 맞춘 형식으로 변화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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